선과 악, 그리고 법 긴 생각

선함(착함)에 대한 글이 반응이 괜찮아 용기를 가지고 좀 더 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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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길을 가다 옥상에서 떨어진 화분에 맞아 다쳤다. 첫 번째는 누군가 '일부러' 화분을 떨어뜨려 다치게 한 경우이고, 두번째는 누군가 '실수로' 화분을 떨어뜨려 다치게 한 경우다. 이때 잘잘못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것이 윤리에 있어 가장 큰 문제요. 더 깊게 밀고 가면 선악의 구분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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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상식적으로 선악을 알 수 있다. 전자는 나쁜 것이고, 후자는 나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친 사람의 운을 탓할 뿐이다. 다만 이 상식적 판단이 '선험적이냐 경험적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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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비자와 왕양명이 나섰다면 다소간의 다른 판단을 할 것이다. 물론 둘 다 누군가가 다쳤다는 자명한 사실에 안타까워 할 것이다. 그런데 한비자는 원인을 제공한 둘 모두에게 잘못을 물을 것이다. 이유는 '실수로' 한 사람의 진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일부러 한 사람은 더 크게 잘못을 묻고, 실수로 한 사람은 탓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양심을 믿기 때문이다. 즉, 한비자는 인간의 양심을 믿지 않고, 왕양명은 양심을 믿는다. 이는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의 차이와도 같으며, 한비자와 왕양명은 이 둘의 사상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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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어떤 이가 상대를 해칠 의도가 있는데 실패할 경우, 결과를 중시하는 한비자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무죄를 선고할 것이고, 양심을 강조하는 왕양명은 이미 의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유죄를 선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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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법은 어떨까? 법은 순자-한비자의 성악설을 잇는다. 양심보다는 결과에 더 중심을 둔다. 하지만 왕양명의 양심을 아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정황상 실수라는 것이 드러나면 형량을 깍아주거나 때론 무죄로 재판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냐 악하냐의 관점은 여전히 현대 법관들에게도 난제지만 외부에 증거에 기댄다는 점에서 순자-한비자에 손을 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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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한비자의 주장은 성문법으로 이어진다. 글로 명기된 성문법은 양심보다는 결과 지향적이다. 맹자-왕양명의 주장은 불문법적 성향이 강하다. 배심원이 배석해 피고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의 양심여부를 판단한다. 차가운 글에 앞서 따뜻한 감정이 판단기준이 된다. 재판관은 배심원의 양심적 판단을 존중하여 형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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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서 어떤 분이 '악'에 대한 질문에 '자기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답했다. 사실 선과 악의 문제는 이렇게 단순하게 대답하기는 곤란하다. 인간은 복잡하며, 인간들의 사회는 더더욱 복잡하다. 한길 사람 마음 속을 모르는데, 집단의 마음 속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선과 악의 문제는 윤리적 삶과 잘잘못의 판단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기에 간과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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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점은 역사를 보면 철학과 결부되어 많은 사례들이 있고, 이 사례들이 후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역사들이 중첩되어 성문법과 불문법의 판단 근거를 주고, 인간의 선악 여부도 결정해 준다. 가령 르네상스 이전에는 정치에서 선악의 판단이 중요했는데, 마키아밸리 이후에는 정치에서 선악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권력과 이익을 얻으면 될 일이었다. 이 관점은 19세기에 이르러 춘추전국시대 이후 폐기된 중국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모든 문명이 '정치=부국강병=강국'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근대 500년의 일이다. 그러나 최근 여기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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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흐름을 패턴적으로 파악해 선악의 판단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선 근시안적이고 좁은 역사 인식, 자잘한 사실들을 나열하는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좀 더 멀리, 크고 넓게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수 있고, 이때 비로소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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