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긴 생각

독서량에 대한 글을 쓰고 나니, 며칠전에 대학원에 진학하는 분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추천서를 써준 터라 뭔가 교훈되는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꼰대 같은 소리를 몇마디 길~게 했다. ㅜㅜ;; 아무튼 정리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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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 대학원 가서 1년간은 어영부영 놀았어요. 3학기째 되서 뭔가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딱히 할 것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할 수 없이 남은 기간동안만이라도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책 100권을 읽어야겠다 결심했어요. 근데 이게 쉽지 않더라고요. 다 읽으니 3년이 훌쩍 지나있더라고요. 이때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대학원은 공부하는 방향을 가늠하는 곳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요.
책을 100권 읽고 나니 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쫌만 더하면 완벽해질수 있는 그런 느낌? 그래서 100권을 더 읽었어요. 그러니까 정말 뭔가 알겠다 싶더라. 오만해졌어요. 여기저기 떠벌리며 다녔죠. 책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어요. 아무튼 그러다가 어느날 나도 좀 책을 써볼까 해서 도전했어요. 내가 쓰면 뭔가 디자인계의 고전이 하나 뙇 나올거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쓰다보니 뭔가 허전하고...솔직히 많이 부족하더라요. 중간에 급하게 마무리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100권을 더 읽었어요. 그랬더니 보완은 안되고 모르는 것만 자꾸 늘어갔어요. 안되겠다 싶어 이제 그만해야지 싶었는데 이미 때는 늦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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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 않으면 딱히 할게 없었어요. 게다가 책을 읽지 않으면 불안했어요. 나는 돈도 잘 못버니까, 이거라도 해둬야 말년에 뭔가 먹고살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들었고요. 아무튼 이것도 중독이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어영부영 쫓기듯 100권을 더 읽은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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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더많이 읽는건 별 의미 없는거 같아요. 책을 많이 읽으면 지혜로워진다는 말 안믿어요. 사실 책을 읽기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른게 없거든요. 지금은 자포자기로 살아요. 예전엔 꽤 센스있는 농담도 잘해서 친구들한데 인기였는데, 지금은 웃기기는 커녕 진지해졌다고 타박만 받아요. 젊은 시절 하두 놀아서 더 이상 놀것도 없고, 술도 잘 못마시고, 돈도 없고, 머리카락도 없고... 정말 책 읽는 것 외에는 딱히 할것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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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대학원때 제 인생 방향이 정해진거 같아요. 대학원에서 뭘 배웠다기 보다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잡은 것이 가장 큰 성과예요. 근데 이게 제가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잡았다가 보다는 그냥 읽다보니 저절로 이렇게 된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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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저는 다행이 당시 대학원에 들어간 등록금과 시간에 대한 아쉬움은 없네요. 물론 센스는 떨어졌지만, 얻은 것도 많거든요. 최소한 공허한 느낌은 별로 없어요. 대학원 다니시는 분들은 당장 눈앞의 일 때문에 자꾸 수업에 빠지게 되요. 아무래도 한학기 등록금 보다 당장 버는 돈이 더 큰 탓이겠죠. 그런데 저는 가성비로 따지면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한거 같아요. 대학원 다니다가 실패한 분들은 다들 "돈이 아깝다"라고 말하는데 저는 "시간이 아깝다"가 맞지 않을까 싶어요. 2년이라는 시간 2000만원으로 보상할 수 없거든요. 사실 '그때'가 훨씬 중요한데... 그렇지만, 수업에 빠지는게 사실 꼭 돈 때문만은 아니죠. 클라이언트와의 약속, 주변 동료직원과의 관계 등 여러 원인이 있으니까... 아무튼 돈보단 시간을 더 소중히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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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길~게 잔소리를 하고, "제가 꼰대처럼 말이 많았죠. 어서 가죠"하고 서둘러 나왔다. 돌아서서 생각하니 내 이야기만 한거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냥 잠자코 저 분 이야기를 들을걸...' 후회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역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건 아니야... 잔소리만 길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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