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에고, 수퍼에고 그리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긴 생각

이드는 충동이고, 에고는 자아다. 그리고 수퍼에고(초자아)는 자아의 도덕률이다. 이를 다시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면 충동의 무의식이에서 시작되고 충동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에고)이다. 자아는 무의식과 의식의 융합과정이다. 그리고 초자아의 도덕률은 다시 무의식이다. 

기억은 장기기억과 단기기억으로 나뉜다. 장기기억은 오랜시간 저장되어 자아의 도덕률을 형성하는 기억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암묵기억과 의식되는 외현기억으로 나누어져 있다. 단기기억은 즉각적 사고 과정 그 자체인데 자극감각 자료가 유입되면서 전전두엽에 잠깐 머물다(5분정도) 사라지는 기억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장기기억이 된다. 즉 단기기억은 우리 의식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단순히 공간과 상황을 판단하는 보조자료로만 작용한다. 쉽게 말하면 단기기억은 우리 몸의 단순 기능이고 장기기억은 우리 몸의 구조적 변화를 동반한다. 단순기능이 없으면 구조적 변화도 당연히 없다. 단기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제대로 살기는 어렵다. 

정리하면 우리는 어떤 감각자극을 받으면 먼저 외부의 정보와 내부의 장기기억(외현기억)정보를 꺼낸다. 이 과정은 거의 무의식에 의해 즉각적으로 진행된다. 약 200m/s 정도 앞서 무의식적 뇌작용이 진행되고 우리는 이를 뇌에서 지각한다. 인간의 사고는 일어날 것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것을 해석한다. 즉 의식은 무의식의 자기합리화이다. (나는 철학과 역사도 이런식으로 구분한다. 역사는 기감각자극이자 기억이고 철학은 해석적 자기합리화다.)

감정적 의식작용이 일어나면 이것은 에고다. 사람들은 종종 공상과 현실을 구분하는데 현실과 공상은 구분의 범주가 아니다. 공상은 곧 현실의 일부이다. 현실은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만이 아니다. 일전에 나는 <전습록>을 보면서 양명학과 주자학의 차이를 양심을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다. 주자학은 양심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고 양명학은 양심도 처벌의 대상으로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런 학문적인 디테일 구분은 제외하고 양심은 그 자체로 이미 의식된 상태라는 점에서 현실이다. 다만 남들은 모르고 나만 아는 현실일 뿐이다. 그것이 남들이 모른다고 해서 현실이 아닐수는 없다. 그러므로 공상도 현실이요, 혼잣말이나 혼자있을때 하는 행동도 다 현실이다. 

이 현실은 에고의 작용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인식할때만 그것이 현실이 된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자율신경은 무의식중에 일어나므로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이상理想적 범주에 들어간다. 무의식적 이상이 상처를 입으면 그것은 다시 의식화된 현실이 된다. 

다소 복잡한 이런 도식을 이렇게 써보는 이유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과연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왠지 초자아를 의식의 범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아들이 어머니를 성적으로 의식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등장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장기기억에서 암묵기억과 외현기억을 구분하지 못하는 착각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장기기억상에서 나는 성적 충동은 무의식의 암묵기억이고 이를 제어하는 것은 외현기억이라는 생각이다. 외현기억은 잠재된 의식기억으로 어떤 맥락적 상황에서 깊숙한 의식에서 끄집어나와 재등장하는 기억이다. 
이 두 기억은 형성되는 신경전달물질과 저장장소가 다르다. 암묵기억은 세르토닌 작용으로 뇌의 편도와 소뇌, 선조체에 저장된다. 반면 외현기억은 도파민의 작용으로 해마를 통한 장기증강과 공간지각 해석을 거쳐 뇌의 전반에 기억된다. 해마가 없는 사람은 5분정도의 단기기억과 암묵기억 저장은 가능하지만 외현기억 저장은 불가능하다. 1시간전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 간질병의 원인을 치료하면서 '해마'를 제거한 사례가 있었다. 사실 분리뇌 연구에서 좌뇌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을 중요하게 보는데 이또한 간질병 치료에서 뇌량을 제거하고 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뇌 구조의 상당한 지식은 '간질병' 치료의 잘못된 접근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기억저장방식은 모듈화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분석하여 종합적으로 볼때 마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 것이란 생각이다. 
감각자극에 의한 성적충동은 이미 초자아의 무의식을 동반한다. 그리고 의식의 자아에서 이를 재해석하여 판단한다. 그리고 판단사례는 다시 무의식에 저장되어 초자아와 이드의 암묵적 근거가 된다. 이 근거를 종합해 감정으로 끄집어 내는 것은 별도의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관습상에서의 문제지 인간의 본능문제와는 상관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엄마에게 느끼는 성적충동 따위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희랍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사상관습에서는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지만, 중국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사상관습에서은 그것을 고통스럽게 수용해왔다. 왜냐면 그것이 인간 본능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것은 초자아적 도덕률이 특정 문화의 관습에서 오는 것을 인간의 본질적 본능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서양 ; 성적충동개념 / 동양 ; 절대의존적 효개념나 물아일체적 연결개념)

인간의 의식은 전체 행동에서 약 5%(가자니가는 2%라고 말한다.)정도다. 우리는 이 5%를 너무 과도하게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 5%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단 1% 차이가 사회의 수많은 하이어라키를 형성시킨다. 그래서 1%라도 아주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5%보다 더 중요한 95%를 생각하며 스스로 겸손해져야 한다. 

자연은 3가지 의미가 있다. 2가지는 서양의 접근으로 대상이나 명사로서의 '자연', 다른 하나는 '본능'이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동양에서 자연은 문장으로 '스스로 그러하다'이다. 나는 이 자연이 바로 우리의 95%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즉 내가 생각하는 환경문제란 바로 이 95%를 말하는 것이다.

덧글

  • 뚜뚜 2015/04/17 11:09 # 삭제 답글

    와우 대단하시내요, 이런 컴플렉스에 관한 이런 심층적인 지식은 처음 봤습니다.
  • tigeryoonz 2015/04/17 22:02 #

    감사합니다. 심층적인지 모르겠지만...
  • 지성의 전당 2018/12/18 22:17 # 답글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에고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 tigeryoonz 2018/12/19 14:07 # 삭제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 지성의 전당 2018/12/23 18:05 #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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