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해결과 공부 긴 생각

나에게 몇가지 불만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많은 이들이 문제만 제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문제제기만으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문제제기는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그 해결의 노력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문제를 제기하면 자연스레 해결책도 떠오르기마련인데 대안은 잘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대안이 스스로 마뜩치 않기 때문이다. 문제제기는 확실해 목소리가 크지만 자신의 대안은 확실하지 않아 소리가 작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문제는 아주 무성한데 이에 대한 대안이나 해결은 잘 보이지 않는다. 또 실제 해결을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냥 조용하게 묵묵히 행동할뿐이다. 

이 사회의 문제는 복잡하지 않고 명확하다. 양극화와 환경문제로 귀결된다. 환경문제도 따지고 보면 자연과 인간의 양극화다. 나는 얼마전 환경문제의 원인은 과학의 발전, 즉 예지계가 현상계와 너무 이반되어 생긱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문제는 양극화인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가벼움때문이다. 문제를 가볍게 보기 때문이다. 문제를 가볍게 본다는 것은 해결할 마음없이 문제제기로 자신의 소임이 끝났다는 태도이다. 대안까지 고민하는 문제제기는 아주 무겁다. 

문제는 실제로 무겁다. 그렇기에 그 해결도 힘들다. 그래서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은 다른아닌 원인을 아는 것이다. 그것도 되도록 근본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해결의 효율성과 합리성이 높아진다. 근본은 바로 다양한 문제의 원인이 되는 허브다. 그 허브를 장악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근본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은 바로 공부다. 공부는 아주 지리한 자신과의 싸움이다.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내가 제기한 문제가 내 자신의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된다. 즉 자신의 치부에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더욱 신중해진다. 공부를 거듭하면 점차 자신을 단속하게 된다. 이를 <중용>에서는 '신독'이라 한다. '혼자임을 삼간다'라는 의미로 혼자있어도 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처럼 예를 갖춘다는 것이다. 이러기는 정말 쉽지 않다. 공자님도 <논어>에서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어쩌면 문제의 해결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어릴적에 공부에 너무 지쳐서 더 이상 공부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때는 공부의 의미가 뭔지도 몰랐고 지금 우리사회를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공부를 인풋-아웃풋의 교환관계로 본다. 
공부는 교환이 아니다. 축척이다. 축척은 '덕'이다. 그리고 '덕'은 '잘함'이다. 잘함은 바로 '좋음'이다. 그리고 잘함에서 새로움이 창발된다. 이 생성이 바로 '도'다. 그래서 공부는 '도덕'의 순환이다. 도덕을 바로 세우는 과정이 바로 공부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바로 문제해결이다. 

나는 환경문제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여전히 그 해결책은 모호하고 이제는 문제조차 불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문제의식을 유보시키고 당분간 공부만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몇년이 흘렀다. 
그리고 요즘은 일종의 멘붕에 빠졌다. 왜냐면 공부에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제의식이 나에게 일종의 불만으로 바뀐셈이다. 

하지만 걱정은 안한다. 나에겐 해결책이 있다. 그 해결책은 바로 공부를 계속하는 거다. 어짜피 나는 바닥에서 시작했고 내려가봐야 바닥이다. 바닥밑으로 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사실도 안다. 

문제도 명확하고 해결책도 명확하다. 그런데 문제와 해결 사이에 거리가 생각보다 아주 멀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바톤을 터치해야하는지 뒤에 오는이도 없고, 앞서 가는이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옆에서 가는 분들에게 배우는 것으로 위안받을 뿐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트위터